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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집안일에 대한 무질서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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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징징_ 2010. 1. 6.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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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혼자 칼퇴해서 집 앞 마트에서
매일 도시락 싸느라 똑 떨어진 쌀과
린스 따위 쓰지 않는 가느다란 머리결의 소유자 나모키 덕에 늘 먼저 동나는 샴푸와
마지막 한 알을 먹어치우고는, 없으면 불안한 양파 같은 것들을 사고 있는데
나모키에게서 회사 동료와 저녁을 먹고 오겠다는 전화가 왔다.

마침 나도 퇴근 직전 회사에서 팀 사람들과 떡볶이에 순대를 먹고 나온지라
딱히 저녁 생각도 없는 때에,
저녁해결하고 온다는 연락을 받자 속으로 '나이스-'를 외치는 나에게서
늘 5시쯤이면 아빠한테 전화를 걸어 저녁 어떻게 할거냐고 물어보고
먹고 들어갈거야, 한 마디에 왠지 기분좋아 보이던 엄마가 보였다.

맞벌이니까 나는 집안일의 의무에서 조금 벗어나있지만
그래도 늘 내가 해야하는 일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밥 먹고 설거지거리 쌓아놓는 걸 못참아하고
미국 다녀온 피곤한 그날 밤에도 모든 빨래와 집안 청소,
심지어 걸레질까지 끝내고서야 잠자리에 들고
또한 식탁에 고작 수저 놓는 일을 시킬 때도 남자인 오빠가 아닌 여자인 내 이름을 불렀던
전형적인 한국엄마인 우리엄마의 영향인걸까-

항상 자기는 요리하면 잘 할 거라고, 음 난 진짜 하면 잘할거 같아"를 입에 달고 살지만
실상은 큰 키가 싱크대 높이와 맞지 않아 허리가 아프다며 전혀 하지 않는 나모키에게
집안일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대도 강요도 하지 않는다.
다만 쓰레기를 버리러 나간다던가, 애들 화장실에서 감자와 맛동산을 캔다던가,
낡은 전셋집의 망가진 여기저기를 뚝딱뚝딱 고쳐준다던가
동네 철물점 아저씨의 포스를 폴폴 풍기며
욕실에 연수기를 직접 달고, 부엌에 수도를 직접 갈아주는 일들은
알아서 잘 해주니까-
또 성격상 한번 시작하면 얼마나 꼼꼼하게 하는지
옆에서 쪼그려 앉아서 일하는걸 가만히 지켜보노라면 인건비라도 줘야하나 싶다.

이러한 하드코어한 일들은 주로 나모키가
매일매일 해야하는 집안일들은 주로 내가 하는 것으로 자연스레 나뉘어져있는데
대신 청소와 빨래널고 개기는 함께 해야한다.
결혼 초, 오빠 지금 이것 좀 해줄래?" 하면
일은 같이 해야하는거야. 이따가 너 일할때 나도 이거 할래"라는
뭐라 딱히 반박할 수 없는 나모키의 논리를 지금은 내가 입에 달고 산다.
지금 빨래 돌리고 있으니까 이따 널자!"
응"
대답을 참 잘하는 내 남편-

그러다가 그저께처럼 꼭 같이 할거라고 큰소리 빵빵 쳐놓고 잠들어버린
게다가 패딩잠바 옷깃을 여며쥐고 벗기지말라며 아내를 변태로 만들어버린
그런 날 다음날인 어제는-
내가 두 사람의 도시락통과 텀블러를 설거지하고
도시락반찬으로 어묵조림과 계란말이를 하는 동안
조용히 혼자 빨래 걷어서 (우리의 서랍장에 어울리지 않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개어놓고
커다란 몸으로 집 여기저기를 할 일을 찾아 종종 걸음으로 다니는 걸 보면
난 참 재미있고 또 재미있다.

서로 모두 할 일을 마치고
놓친 드라마를 보기위해 모니터 앞에 나란히 앉아서
수고했삼요! 외치고
(우린 둘중 누군가, 작은 것이라도 집안일을 하고나면 수고했삼요!라고 인사를 하는 습관이 있다.)
아, 이제 커피나 마실까~ 했을 때
벌떡 일어나 내 주문대로 '아메리'를 내려주고
퇴근길에 사온 애플파이까지 따땃하게 데워다주는 남편이 있어서
나는 참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결혼 후 만 3년이 되어가도록
아직도 절대로 화장실 불을 끄지 않고
아직도 반드시 양말과 티셔츠를 뒤집어 벗어서 내다놓고
청소좀 하자, 하면 난 괜찮은데? 너도 양말신고 있어"해버리는
그런 남편이지만-

자기는 구멍난 티셔츠를 입고 다녀도
철마다 입을 옷 없다 투덜대는 나를 위해 자금지원실을 열어주고
때마다 눈이 휘둥그레지는 선물로 나를 된장녀로 만들어버린

커피랑 라면은 오빠가 끓여야 진짜 맛있어! 라는 나에게
야, 됐어엉~ 하면서도 꼭 자기가 끓여주는
그런 남편이가 있어서 나는 참 좋다.

나는 내가 잘 하는 걸 하고, 남편은 남편이 잘 하는거 하면 되는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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